영화연극이야기 35

<이승만대통령의 폄훼된 참 모습을 밝힌 기록영화, “건국건쟁”>

김수남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4/02/20 [09:30]

영화연극이야기 35

<이승만대통령의 폄훼된 참 모습을 밝힌 기록영화, “건국건쟁”>

김수남 논설위원 | 입력 : 2024/02/20 [09:30]

▲     ©충청의오늘

 

관람객 평점 9.80 그리고 개봉 12일 만에 38만 관객을 동원하여 극장 박스오피스 3위를 기록한 한국기록영화 사상 이변 작, 김영덕 감독의 <건국전쟁>이 화제영화로 부상하고 있다. <건국전쟁>은 지난 70년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이승만대통령과 건국 1세대들의 희생과 투쟁을 조망한 작품으로 전교조와 민주화세력에 의해 독재자로 폄훼된 이후 잊혀져 간 이승만대통령의 복권을 대변해 주는 영화이다. 윤석열정부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이승만대통령을 선정하였다. 

 

기록영화 <건국전쟁>은 칼라의 현대영상과 흑백의 기록영화로 구성되었다. 국부 이승만대통령의 헌신으로 기초를 다진 부강한 대한민국의 모습으로 오프닝을 시작한 <건국전쟁>은 이승만의 공적과 과실을 사건의 순서와 관계없이 기록영상과 내외 관계자의 인터뷰로 적절하게 구성하였다. 영화기술적인 면에서 언급할만한 특별한 영화는 아니지만, 내용적으로 국민에게 오랫동안 진실이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밝혀준 충격적인 영화였다. 일반인이 상식적으로 알고있는 기록영화는 사실영화라고 믿는다. 그러나 기록영상의 유물론적 사실과 인터뷰나 해설로 구성된 기록영화의 사실성은 편집의 역할이 감독의 주관에 의해 작용하기 때문에 <건국전쟁>은 완벽한 사실영화라기보다 기존 기록영화와 차별화된 사실영화다. 어쨌든 기록영화로서 드물게 관람객들을 몰입시킨 이 영화는 이승만의 열정적이고 나라 사랑하는 참모습이 관객을 아니 대한민국 국민을 화면 속으로 이끌었다. <건국전쟁>이 담은 이승만의 공과 실을 담은 세파트의 주요 내용은 광복이전의 공으로 이씨왕조를 해체하고 민주공화국을 주장한 혐의로 반역자로 선고된 사형수였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특별사면 받아 미국으로 망명한 이승만, 미국에 거주한 40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였고 하와이에서 조선이민자를 위한 교육사업으로 한인학원, 한인기독학교의 설립이요, 광복이후의 공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립, 여성투표권부여,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과 8억달라 원조, 반공포로 석방, 국가보안법제정, 원자로준비와 충주비료공장 등으로 산업기반시설 조성, 일본어업확대 방지와 독도경계선, 대마도와 반출문화재 등을 요구한 반일대통령의 모습, 이승만의 정치적 과실로는 제주4.3과 여순반란의 양민학살사건, 반민특위 무산, 사사오입 정쟁, 3.15부정선거와 4.19의거, 한강대교폭파 등에 대한 거짓과 진실을 밝혔다. 그러나 부정선거와 한강대교 폭파사건 이외의 해명은 설득력이 부족하였다. 이 밖에 김구선생이 김일성이 제안한 한반도 공산화와 공산화 이후 김구를 지도자로 모신다는 약속을 받고 북에 동조했다는 사실여부는 제시된 영상내용 만으로  확증하기엔 문제가 있다. 6.25전쟁이 끝난 후, 1954년 미국 국빈으로 초대된 이승만은 미 상,하원에서 “ ......한국이 암담한 처지에 있을 때 자식과 남편, 형제를 보내주신 미국의 어머니들에게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는 연설로 의원들과 참전용사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고 외국 수반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 ‘영웅의 거리’에서 펼친 카퍼레이드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이승만을 환영하는 모습이 확인됐다. 이런 위대한 우리의 지도자를 독재자, 친일파로 매도하여 추방시킨 것은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의 유서내용은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겁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를 남기며 1965년 7월 19일 90세 나이로 영면할 때까지 조국을 염려한 이승만대통령! 다행히 박정희대통령의 결단으로 그의 유해가 고국에 귀환할 수 있었다. 이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지만, 국장을 반대한 다수의 좌파 국회의원과 민주화운동 세력 등 좌익시민단체들의 극렬한 반대로 가족장으로 치루게 되었다. 국립현충원으로 가는 그의 장례행렬에는 거리를 가득메운 국민들의 조의로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죄스러움을 전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역사교육은 왜곡된 독재자 이승만으로 떠밀어진 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인식되었다. 봉건시대의 폭군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공과 사의 기록이 역사에 남았으나, 대한민국을 건국한 국부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폄하되고 왜곡되다 못해 1970-80년대 이후 민주화세력과 전교조에 의해 그의 공적 지우기까지 자행되었다. 

 

왜? 이승만지우기가 열린사회의 공론장에서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던가. 그 중심에는 민주화세력의 대부요, 노무현, 문재인의 사상적 스승인 저널리스트 이영희(전 한양대 교수)가 있었다. 이영희는 모택동과 김일성 추종자로서 김일성의 ‘이승만 괴뢰 타도’를 친북좌파(간첩?)와 더불어 실천하였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못한 민주화세력들이 그를 따라 이승만 퇴출을 성공시켰고 이승만 지우기도 지속적으로 이루고 있었다. 그 결과 전교조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은 이승만을 친일파요 독재자로만 기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영희는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을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민주화세력을 선동하여 이승만 건국의 공헌을 폄훼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이승만이 한국전쟁 때, 서울을 사수한다고 거짓방송하고 한강대교를 폭파하면서 도망간 ‘Run승만’이라고 조롱하였으나 조작된 거짓 선동이었음이 “건국전쟁”의 기록물로 밝혀졌다. 그동안 서재필선생을 독립운동의 대표로 내세워 미국에 서재필 기념관을 짓고 지원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의 뉴욕 기념관은 일원 한 푼 지원받지 못해 폐허가 되었다. 돈없는 독재자를 보았는가, 추방당한 억울한 국부 이승만대통령의 조국사랑 유언장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 국민들은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판단은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가 이승만대통령에게 무슨 짓을 벌렸고 방조하였는지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김수남 논설위원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