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영화이야기 34

<지적 사치와 오만의 사회성 작품, 이현화 “누구세요”>

김수남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4/02/01 [14:43]

연극영화이야기 34

<지적 사치와 오만의 사회성 작품, 이현화 “누구세요”>

김수남 논설위원 | 입력 : 2024/02/01 [14:43]

▲     ©충청의오늘

 

한국연극협회가 주최하는 <늘푸른연극제>는 만 75세 이상 원로연극인 중, 한국 연극사에 기여도가 높은 연극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연극제다. 제 8회 행사의 마지막 공연으로 이현화의 <누구세요>를 반세기만에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서 재공연(1/24-28)하였다. 이현화 작가는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요한을 찾습니다>로 데뷔한 이후, 문학사상 신인작품모집 당선(누구세요), 현대문학상, 영희연극상,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 동아연극상 작품상,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기독교문화 대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부조리하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 알려진 그는 <카덴자>(1978), <우리들끼리만의 한 번>(1978), <오스트라키모스>(1978), <0.917>(1980), <산씻김>(1981), <불가 불가>(1982), <넋씨>(1991), <협종망치>(2000) 등 작품을 남겼다. 이현화 작품의 사회성은 당대의 사회상 반향을 놓치지않는 사회적 의식으로 관객의 사회적 행위를 추구하였다. 필자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파괴한 총체예술성 강한 ‘사육신 고문극’, <카덴자>(채윤일 연출)을 감성이 아닌 온몸으로 관극하였던 경험을 잊지못한다. 1970년대 유신헌법 시대에 공권력으로 인간존엄성을 파괴하는 상징적인 클라이막스 장면으로 불특정 여성관객의 고문장면을 연출한 <카덴자>는 ‘카텐차(Cadenza)’의 비표준어로 독주 협주곡의 클라이막스에서 즉흥적으로 연주된 상상력의 하이라이트를 의미하는 음악용어다.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입상하지 못한 그 결과는 당시 연극계의 심사수준에 크게 실망하였다. 반면에 부조리극을 표방한 <누구세요>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이현화의 지적 사치와 오만의 사회성 작품’이라는 부정적 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부조리극의 본 고장인 유럽에서 이미 쇠퇴한 연극형식을 빌어 온 <누구세요>는 실존철학의 바탕이 없는 한국에서 ‘인간 실존’을 묻는 넌센스라고 판단했다. 당시 한국연극 비평계는 1970년대 한국사회의 산업화 후유증과 폭력적인 정치적 상황을 들어낸 부조리한 형식의 독특한 사회성 작품으로 호평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시점의 재공연은 오히려 관극의 공감대를 더 충만시킬 문화적 성숙이 기다리고 있어서 극의 난해성을 극복하고 극적 재미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을 주었다.

 

박승원 연출의 <누구세요>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 아니라 쉬운 작품을 어렵게 만들었다. 획일화된 아파트문화가 만들어 낸 이웃 간의 소통부재와 주말부부의 인간소외로 빚어진 불륜의 외도현상 그리고 1970년대 유신헌법의 정치적 상황에서 불특정 국민이 겪었던 공권력의 폭력 등 사회현상을 극화하였다. 지겹게 반복되는 전화벨 효과음으로 시작하는 프로로그와 가슴을 치는 폭우와 천둥소리의 에피로그, 그 사이에 극적 상황이 전개된다. 매주 월요일이면 만나게되는 주말부부, 통계과장인 남편(진현태 분)과 아내(김도연 분) 두 사람은 일주일 만에 만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낯선남자’와 ‘낯선여자’로 존재하며 불륜의 외도를 한다. 서로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며 실랑이를 벌린 아내는 이웃집 아내의 도움을 받지만 오히려 문제해결은 복잡해지며 또 ‘다른 낯선남자’가 등장하여 자기 집이라고 우긴다. 형사를 불러달라는 두 남녀에게 내가 형사우두머리라며 권총을 겨누며 고문과 폭력을 자행한다. 이웃집 아내가 재등장하면서 형사가 남의 집에 잘못 들어 온 이웃집 남편으로 밝혀져 극은 반전되나, 다시 ‘낯선남자’와 ‘낯선여자’의 어려운 소통이 반복된다. 결국 낯선남자는 낯선여자를 새디스트적 강간을 시도하면서 극은 종막된다. 폭우와 천둥소리의 에피로그에 이어 보여주는 짧막한 쿠키장면은 출장에서 돌아 온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세요’ 할려다가 ‘여보’라고 부르며 정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다시 역전하여 장보러 나간 아내대신 장보고 온 이웃집 아내를 맞이하는 남편을 보면서 극의 순환성이 연출되는 오프닝엔딩은 카텐콜에서 관객이 퇴장할 때까지 울리는 초인종 소리로 끝이 없는 극의 반복성을 관객에게 고착시킨다.

 

<누구세요>의 효과음(정선화)은 상징적인 주제적 언어로서 기능하는 독창성이 있다. 받지않는 공허한 벨소리의 울림은 ‘소통의 부재’, 빗소리는 ‘연속될 수 없는 상황전환의 기억지우기’, 폭우와 천둥소리는 ‘잔혹한 공권력의 폭력’, 시계 자명종소리는 ‘조작된 반복의 규칙’, 카텐콜 이후의 멈추지않는 초인종소리는 ‘시작과 끝이 없는 새 인물의 등장’ 등의 효과음은 극과 상황적 주제를 대변한다. 무대미술은 소극장 공간에 잘 맞춘 미니멀 무대(임민)이지만 베란다 공간을 비닐카튼으로 분리한 것은 화장실 공간으로 오해되는 부적절함이 있다. (혹 여자의 나신을 실루엣으로 보여주려는 시도?) 조명(정철)은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전원스윗치를 활용하는 리얼리티적 재치가 있었으나 전원스윗치없는 기본조명의 전환으로 리얼리티의 일관성이 무너졌다. 공연스탭진의 조화로운 참여는 극적 분위기 창출의 무난함에 보탬이 되었지만, 등장인물들이 지적 유희의 상황을 너무 가볍게 대한 탓으로 지적 유희의 게임을 즐기지 못하였다. 연기에 몰입한 어설픈 감정과 대사구사로 넌센스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못하는 연기의 문제는 연출의 책임이며 그 결과 작품방향의 일관성이 약화되었다.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허벅지를 들어내면서 의상 탈의를 시도하는 여배우의 에로틱한 연기는 시선끌기용인지 아니면 폭력적인 강간장면 연출의 복선인지 의미없는 상황연출이다. 연출가의 예리함으로 관객의 잠자는 의식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작품의 사회 고발정신을 곁눈질 속에 묻히게 하는 아쉬움은 이현화의 사회의식이 부조리한 형식 속에 애매하게 자리잡은 탓이다. 그러나 <누구세요>는 작품의 의미를 들처내는 반복적인 극의 의미축적으로 창착극의 다양성을 넓혀 주고 정통극의 다른 차원의 예술성을 제시한 한국연극사에 기록될 작품이다. 

 

김수남 논설위원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