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극이야기 4

<한국영화 100년 - 효시작 지정문제에 대하여>

김수남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4/18 [09:30]

영화, 연극이야기 4

<한국영화 100년 - 효시작 지정문제에 대하여>

김수남 논설위원 | 입력 : 2022/04/18 [09:30]

▲     ©충청의오늘

 

  한국영화의 효시작을 정하는 문제는 신중하게 결정하여야 함에도 한국영화 100년사를 맞이하면서 한국영화계는 안이하게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한국영화 효시작으로 지정하였다. 한마디로 연쇄극은 영화가 아니고 세계영화사적 입장에서 언급한다면 확대연극 또는 총체연극으로 분류된다. 한국영화의 효시작이 지정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1966년 〈한국영화인협회〉회장, 윤봉춘의 명의로 1919년 단성사에서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제정할 것을 문화공보부에 요청하였다. 문화공보부는 이를 받아들여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한국영화사의 서술은 김도산의 반쪽자리 영화, <의리적 구토>와 윤백남의 온전한 영화, <월하의 맹세>(1923년)를 한국영화의 효시작으로 논쟁하고 있었다. 반쪽자리 영화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영화로 인정하느냐는 공인의 문제를 논의한 결과  순수 영화로 확인된 <월하의 맹서>를 한국영화 효시작으로 새롭게 지정하자는 견해가 주장되어 한국영화사의 기록은 한국영화의 효시작을 <월하의 맹세>로 새롭게 정리하였다. 그러나 1923년 1월에 제작 발표된 원산만의 <국경>에 대한 실체 논쟁이 일어나 <월하의 맹서>보다 3개월 앞서 발표된 <국경>을 한국영화의 효시작으로 재론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1920년에 제작된 <호열자>로 잘못 알려진 계몽위생영화, <인생의 구>는 취성좌의 김소랑이 호열자를 예방하는 취지로 만든 작품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사가 공동제작하였다. 조선총독부 위생과 영사실 및 지방 극장에서 1920년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상연하였다는 매일신보의 기록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매일신보사가 애독자위안회로 제공한 八島柳堂의 원작, 각색, 감독의 <愛의 極(애의 극)>을 1922년 4월 15일부터 24일까지 총독 관저, 부산 국제관, 마산 도좌에서 상영한 기록도 등장하였다. <월하의 맹서>나 <국경>보다 먼저 제작된 두 편의 영화의 확인은 극영화로서 한국영화 효시작 지정을 신중히 결정하여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2019년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 행사를 주관하는 한국영화계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상영한 영화적 행위로 인정하여 한국영화 효시작으로 지정함으로써 1966년 문화공보부가 지정한 상황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한국영화사적 기록이 다양하게 확인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공식적인 연구를 포기한 채 한국영화 효시작을 지정하는  우를 범했다. 차선책으로 <의리적 구토>를 공연한 같은 날 상영한 기록영화 <경성전시의 경>을 효시작으로 지정할 수도 있었는데, 극영화만을 효시작으로 지정한다는 반영화사적 의지는  <경성전시의 경>을 효시작 거론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한국영화사 기록에 대한 이 무지함은 북한이 1946년 제작된 여러편의 기록영화를 무시하고 1949년 김일성의 빨치산영화 <내고향>을 대외 선전목적으로 효시작으로 지정한 것과 다를바 없다. 세계 최초 영화로 기록된 프랑스의 <열차의 도착>도 플래트폼에 들어오는 열차를 촬영한 한 장면의 기록영화였고 세계 각국의 효시작도 모두 기록영화이다. 조선의 기록영화는 일본이 한일합방을 눈앞에 두고 1908년 이등박문이 조선의 이근세자를 따라 전국을 두루 순시한 모습을 찍은 <한국관>이 최초의 기록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총독부가 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단성사 사주 박승필이 제작한 1919년 고종의 장례를 기록한 <고종인산실경>과 <경성전시의 경>, <부산, 대구 전경> 등도 기억해야 한다.

 

 

 

김수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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