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주 칼럼]괴산경찰서는 ‘강급제묘’ 파묘 진실을 밝혀주길...

하선주 칼럼리스트 | 입력 : 2021/09/23 [10:01]

▲ 현장 답사에 참석한 당시 김근수 중원대학교 박물관장과 하선주 동양일보 괴산주재(필자)의 모습. 오른쪽의 사닌의 빨간색으로 그어진 부분이 봉분의 모습이다.(사진은 당시 함께 참석한 이상주 전 교수가 촬영함).  © 충청의오늘


파사현정(破邪顯正)은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올바르게 바로잡음을 뜻한다.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부정한 것은 깨치고 바른 것은 드러내어야 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신 하나로, 며칠 전 괴산경찰서에서 참고인조사를 받았다.


굳이 실체가 있었다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대해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 실체 확인을 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강급제묘’가 있는 곳이 개발허가가 났고, 개발자는 개발을 통해 지금은 그 형체를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누가 이런 의식없는 일을 자행한 것인가? 문화와 역사적 가치를 소홀이 여기고 물질만능주의가 만들어낸 소탐대실(小貪大失)의 현장은 아닐까?
위법한 일을 하면서 까지 개발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다. 누구나 다 알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상주 전 중원대학교 한국어 교수는 ‘강급제묘비-상석’ 건립연도를 1903년으로 추정했다.
‘강급제비’에 얽힌 일화는 강씨성(진주강씨)을 가진 선비가 이탄(검승리) 일원에 살았으나 장원급제를 하고 강 건너 제월리 홍 판서(벽초 홍명희 증조부)댁에 인사를 가지 않아 벼슬길이 막힌 것을 알고 주변에서 홍 판서에게 인사를 보내겠다. 하지만 홍판서는 ‘인사도 늦으면 인사가 아닌 법이다’란 말을 남겨 조선시대 예를 중시하던 선비들에게 유행어처럼 번졌다. 강급제 또한 끝까지 인사 청탁을 하지 않고 청렴선비의 절개를 지킨 표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간에서는 홍 판서가 벽초 홍명희의 할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나 할아버지인 홍승목은 판서를 역임하지 않아 공조·이조·예조·형조 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지낸 홍명희의 증조부인 홍우길(1809~1890)로 추정하고 있다.

 

▲ 강급제비의 묘를 바라보고 좌측의 문관석의 귀의 모양이 다르다.  © 충청의오늘


그 외에도 강급제비의 문관석 중 하나는 양쪽의 귀의 형태가 다르다, 이유인즉 이탄의 어린아이가 놀다가 돌로 문관석을 내리쳐 귀가 떨어졌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그 집안에 귀없는 아이들이 태어나자 문관석을 새로 제작해 다시 설치했다는 유례가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 유례를 교훈삼아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이 교수는 "앞으로 이 묘소에 묻혀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괴산에 있는 ‘강급제묘’가 풍수지리와 다른 이유 등으로 가묘인지의 여부, 묘비에 성명을 쓰지 않고 관직만 쓴 사연 등은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라며 “괴산과 유래가 깊은 ‘강급제비’는 보호해야 할 문화적 가치가 충분하며, 묘소의 주인공을 알 수 없게 이름을 새겨놓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도 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인근 주변의 묘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진주강씨 방계후손들이 벌초를 했고, 그 방계 후손들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괴산군청에 묘를 복원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했으나 수사 중인 사건이라 결과가 나온 후 조치하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강급제비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로도 손색이 없지만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가지고 있어, 공원화는 물론, 문화화관광의 바잉포인트(baying point), 셀링포인트(selling point) 개발로 이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다. 특히 괴산군은 선비문화를 개발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청렴 선비문화가 있을까?

이런 소재가 되는 ‘강급제비’를 개발자는 상석과 '문인석' 등 묘 석물을 괴산읍 검승리 산 14-1에 묻은 후 문제가 발생하자 자진해 굴착기로 찾아냈다.
석물이 없어졌다고 신고한 민원인에게 불법파묘임에도 분묘개장 신고한 묘라며 석물은 땅속에 있다 답해 준 것은 무엇인가?
분묘개장한 묘가 아니라면 석물을 허가없이 몰래 땅속에 묻은 것은 불법이 안되는가?
개발자는 왜 묘가 없었다하고 소중한 상석과 석물을 왜 땅속에 묻어야만 했을까?


검승리 산 14-1의 1차 분묘개장공고는 분묘기수 5기였다. 그런데 강급제묘는 왜 분묘개장 신고가 안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봉분도 있었고 석물도 있었다. 파묘이후 그 자리에서 파관된 관조각도 이상주 교수에 의해 발견됐다.


언론에 보존 여부 등이 여러 차례 게재되었는데 행정부서에서 몰랐을리는 없을 것 같다.
2016년 태양광 개발이 유행일 때 이 일대에 태양광 허가를 받으려 했지만 강급제비 묘를 지키자고 성명을 낸 단체도 있었다. 이상주 전 교수님을 비롯한 괴산향토사 연구원들에 의해 봉분 있는 사진과 함께 괴향문화집에도 발간되었다.


필자 또한 2016년 강급제비 묘를 두 차례 답사를 통해 발견하고 직접 취재해 기사를 송고했다. 정말 행정부서와 개발자는 정말 강급제비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이는 일반인도 최소 왜 그랬을 것 같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럼 개발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더 잘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소중한 유산을 그저 몇 사람의 이익을 위해 흔적도 없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진실규명이 이뤄져야 하며 개발취소는 물론 책임자에 대한 합당한 조치와 더불어 ‘강급제비’를 원 위치에 복원과 공원화로 조성 군민을 위한 우리 국민 모두를 위한 자산으로 보존과 활용해야 할 것이다.


공직자는 누구를 위한 행정을 해야 하는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객관적인 조사를 통해 지금이라도 행정처분을 해야 한다면 행정처분을, 다른 조치를 해야 한다면 합당한 조치를 하고, 개발자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많은 이들을 위한 것에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인근복원은 의미가 적다. 원위치 복원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해 보강조사를 하게 된 괴산경찰서는 오랜 시간이 지났고 파묘와 개발로 형체가 없어져 어려움도 있겠지만 사실을 사실이라 결론을 내 주어 행정이나 개발자가 합당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려 줄 것을 기대해 본다.


그렇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은 부정한 것은 깨치고 바른 것은 드러내어야 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잘못을 덮으려 한다 해도,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경찰이 어렵겠지만 진실에 대한 판단을 해주어야만 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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