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네 번째 주인

홍성남 시인 | 기사입력 2013/12/03 [07:38]

세한도 네 번째 주인

홍성남 시인 | 입력 : 2013/12/03 [07:38]
 
▲   홍성남 시인    © 하은숙 기자

 
 
 
 
 
 
 
 
 
 
 
 
 
 
 
 
 
 
 
 
 
 
하정 민영휘(荷汀 閔泳徽)

                   홍성남 시인

세한도 네 번째 소장자 민영휘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모르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자격 없는 이 만나 떠도는
기구한 운명 시작 되었다

친일 행적 세한도와 떼어 보려해도
소장 과정 알 수 없고 대접도 푸대접 
하나를 보면 열 안다는 말 그르지 않다
친일파와 민씨척족세력가 탐욕에는
나라 보물의 가치 보이지 않았다

물려받은 친일 아들 민규식
세한도 모르는 건 아비 닮아
베이징의 골동상에 내놓았던 
후지츠카 치카시에게 팔았던
소장 자격 없는 이들 이었다


민영휘(1852~1935)는 한말의 문신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민두호이었다. 1877년(고종14) 정시문과에 급제해 주서, 정언을 거쳐 민씨척족세력을 배경으로 동지경연사, 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1886년 참의내무부사, 도승지를 이듬해는 주일변리대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민씨척족세력의 우두머리로 경리사, 이조판서, 선혜아문당상, 친군경리사 등을 역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토벌하려 했다. 이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전라남도 영광 임자도로 귀양 갔다. 그런데 탈출해 벽동(碧潼)의 청군부대에 은신하고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1896년 대사령(大赦令)으로 귀국한 뒤 중추원의장, 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작위를 받았다. 이후 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한빛은행 전신)을 세웠고, 1906년 5월에는 휘문학교를 설립했다.

 
홍성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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