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不義)에 저항하는 힘

오미경 충북분석심리 연구소장 | 기사입력 2014/01/30 [07:28]

불의(不義)에 저항하는 힘

오미경 충북분석심리 연구소장 | 입력 : 2014/01/30 [07:28]
 
 
▲      ©한국in뉴스
며칠 전 신문에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박상표 정책국장의 죽음을 다룬 기사를 봤다. 지난 2006년 미국산 쇠고기 개방 반대 의견을 주장하며 광우병 전문가로 인정받던 그의 죽음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기사를 만날 때면 늘 마음 밑바닥에서 죄책감이나 미안함 같은 감정이 올라온다. 사실 나의 대학시절인 1980년대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듯이 유신정권에 맞선 수많은 민주항쟁이 있었던 시대였고, 나 또한 시대적으로나 연령적으로나 사실상 그 중심부에 있었다. 나도 최루탄으로 인해 콧물, 눈물을 수 없이 흘렸었고 손도 댈 수 없이 따가운 살갗의 고통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1980년대의 나는 정의의 불타는 호기어린 심정이 강해서 마음만 먹으면 앞뒤좌우 가리지 않고 덤벼들 던 때였었다. 그래서 학생운동 모임에도 수차례 참석했었고 결의에 찬 굳은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는 생각 했었다. ‘과연 내가 이렇게 나가서 내 한 몸 불사른다고 세상이 바뀔까? 나 한 사람 포박되고 투옥되어서 정말 세상이 바뀐다면 난 죽어도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래서 나의 행동, 나의 선택이 아무런 의미 없이 끝나버리고 나만 부정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 부적응아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겁이 났었다. 그래서 나는 동지들과 함께 학생운동을 함께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숱한 날을 고민 했지만 결국 그 거대한 물결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했었다. 그 후 나는 동지들을 버리고 비겁하게 혼자 빠져나온 것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이어폰으로 두 귀를 막고 다녔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늘 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지금 난 여전히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었다. 사람들이 불의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데모(Demonstration)와 같은 의사표현이 정말 타당한지, 이 방법 밖에는 없는지, 좀 더 지혜롭게 대처 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내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언젠가 지인이 자신의 ‘행동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토로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심정을 백번 이해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찾은 차선책은 ‘행동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소극적일 수 있지만 지금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있어서 많은 부분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개인의 삶의 역사의 다양성 때문이고 또 하나는 개인의 정신적 외상(trauma)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개인의 특성을 만들어 내고 그 특성대로 사람들은 사고하고 행동한다. 사고의 일부분은 외부적 자극(교육)을 통해 수정되기도 하지만 결국 이러한 삶의 경험들은 개성이 되고 그 사람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자극에 대한 반응도 모두 다른데 예를 들면 어떤 자극을 받으면 행동하고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뒤에서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 정치적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음악이나 미술, 몸(행위예술)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글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인, 소설, 수필가와 논설, 칼럼니스트들도 있고, 교육 사업을 통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거나 또 다른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을 이웃과 나누는 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자신의 모습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고 원망하거나 이상하게 볼 일도 아닌 것이고,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스러워 할 일도 아닌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삶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볼 일이다. 자신의 Trauma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도 인정하고 수용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회에 저항하는 마음의 근본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또 다른 불의한 일을 만들 뿐이다. 저항은 수용을 바라는 강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정의를 부르짖고 바름을 외치는 사람들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도록 그들을 보듬어주어야 하겠다. / 오현주(미경) 충북분석심리 연구소장    


 
오미경 충북분석심리 연구소장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손대환의 시각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