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장장애인충북협회 2013 투석수기공모전 대상작]다시 희망을 품고 꿈을 키우다.

김학성

하은숙 기자 | 기사입력 2013/12/27 [07:55]

[한국신장장애인충북협회 2013 투석수기공모전 대상작]다시 희망을 품고 꿈을 키우다.

김학성

하은숙 기자 | 입력 : 2013/12/27 [07:55]
 
▲      © 하은숙 기자

 
 
처음 수기공모를 권유 받았을 때 다소 망설였다. 지금도 생각하기 조차 힘든 시절을 회상하는 것 자체가 괴로웠고, 내 인생의 한 기로[岐路]에 따스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한 여인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을 표현하는 것이 미안했고 그리고 내 사생활을 일정부분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며칠을 두고 쓸까 말까 갈등했다. 그러나 써 보자고 결정하고 이렇게 용기를 내보는 것은, 신장장애로 인해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비관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장장애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어서이다. 
 
내 나이 올해 쉰 넷이다. 서른세살 무렵 당뇨합병증으로 시달리다가 마흔넷이 되면서부터 투석을 시작해 내년 4월이면 투석한지 만 10년이 된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병마에 시달리고......
지독한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헤어짐의 아픔에 몸을 떨며......
살아온 지가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장 행복하고 많은 일을 할 나이에 아무런 희망도 꿈도 없이 좌절과 절망 속에 안타깝고 처량한 내 인생을 분노로 가득 채우며 살았다. 무미건조한 하루하루가 싫어 그냥 세월이나 빨리 지나갔으면 했다.
 
그 동안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8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10년 전에는 어머님이 아버님 곁으로 가셨다. 20년 전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짐의 아픔을 겪었다. 삶이란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과 나의 여인은 내 곁을 떠나 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적 지주였던 부모님을 여의니 내 자신이 더 초라하게 여겨졌고, 신장장애로 인해 애뜻한 여인을 떠나보내니 마음이 더욱 공허해졌고 아려왔다.

대학교 졸업 후 큰 꿈을 안고 청주로 내려와 누님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입시미술학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여기서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사연이 시작되었다. 내 나이 27세의 파란만장한 시기에 꽃다운 스무세살의 아름다운 미대 지망생을 운명처럼 만났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로 만남을 시작해 계절이 바뀌면서 점점 행복한 연인사이로 발전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아름답고, 새소리도 예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도 모두 씩씩한 삶의 생기로 느껴졌다.
 
그녀와 사귀고부터 사계절이 일곱 번이 지나갔다. 쉽게 피로해지는 등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다.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생소했다. 입시생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습관 그리고 지나친 음주가 당뇨병을 일으켰던 주요원인이었던 것이다. 당뇨병! 당시 사회분위기로는 당뇨병의 심각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나 또한 가족력도 없으니 당뇨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당뇨병 진단을 받은 후에도 술을 좋아했던 나는 학원이 끝나면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기를 1년,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한쪽 눈에서 피가 흐르는 듯 한 느낌이 들어 안과로 향했다. 안과에서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다음날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망막에 이상이 생겼고 피를 제거하는 수술과 레이저 치료를 해야 했다. 당뇨합병증을 얻은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의외로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실명을 하신 분, 다리를 절단하신 분, 투석을 하시는 분... 당시로서는 투석을 하시는 분이 많지 않아 투석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다. 얼마 후 다른 쪽 눈에서도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똑같은 수술과 똑같은 치료를 받았다. 그제서야 당뇨합병증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나쁜 습관들을 고쳐나갔다. 종합검진도 받았다. 검진결과 이미 여러곳에서 이상이 발견되었다. 특히, 신장기능이 떨어져있었고, 소변에서 단백뇨가 검출되었다. 언젠가는 투석을 해야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앞이 캄캄해졌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이때부터 금주생활을 했다. 그녀와의 행복했던 나날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갔다. 그녀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삶의 영원한 동반자로 여기며 이미 결혼 약속까지 한 사이지만, 내 병든 몸으로 인해 결혼 후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면 도무지 결혼 약속을 지켜 낼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녀를 위해 헤어짐을 선포하는 것이 마지막 사랑이라 여겼다. 내 몸 상태롤 털어놓았다. 그리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녀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는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함께하자고 말했다. 그녀는 집요했다. 설득도 하고 티격태격 다투면서 몇 달이 지나갔다.
 
우리는 결국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평소 데이트를 즐기던 상당공원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가을의 문턱에 선 녹음으로 푸르른 공원의 나무들은 모두 생기 없이 축 늘어져 보였다. 발길에 차이는 조약돌마저도 내 마음과 함께 우는 것 같았다. 공원 한 모퉁이를 지나가던 애완견이 허공을 보다가 멍하니 공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엎드렸다. 공원에 도착하니 그녀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본 그녀의 얼굴이 파리했다. 바람에 헝크러진 머리가 애잔해 보였다. 마음이 아려왔다. 벤치에 앉아 서로를 걱정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졌다. 배웅을 위해 그녀의 집까지 함께 걸었다.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불협화음의 발자국 소리와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애써 나오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의 집 앞에 이르러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그녀를 꼭 안았다. 나는 “지금 하늘에 구름이 끼여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별이 없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이 그렇다. 너와 내가 비록 헤어진다 해도 내 마음 속에 네가 없는 게 아니야. 영원히 간직할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녀는 “선생님 건강하세요. 사랑해요.”로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내 나이 34세 때 네 살 어린 그녀와 8년의 기나긴 사귐을 우리는 그렇게 아픈 이별로 끝을 맺었다.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꾹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울었다. 한참을 걸으면서 울었다.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졌다. 내 몸은 눈물 반 빗물 반으로 젖어들었다. 가슴이 매이어왔다. 공교롭게도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칠석에 우린 아픈 이별을 했다. 그 이후 칠월칠석 전후가 되면 주체할 수 없는 아쉬움과 그리움에 힘들어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꿈과 희망이 사라졌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졸업 앨범을 비롯한 사진 등을 모조리 태우고 내 손목에 선을 그었다. 평소 심신이 쇄약해진 나를 염려해 자주 챙겨주던 누님이 나를 발견해 병원으로 긴급이송을 하였다. 원망스럽고 한 많은 생명이 다시 이어졌다. 훈장처럼 팔뚝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져갔다.
  
침울해지고 우울해진 나는 그 이후 외부활동은 단절하고 집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리도 좋아하던 야구경기장도 가지 않았으며, 공연장과 영화관도 출입을 딱 끊었다. 사우나도 가지 않았고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6개월이 흐르는 동안 점점 내 마음은 황패해져 갔고 사고방식은 비관적으로 변해 갔으며 방황했다.
 
내가 이런 나태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돌파구인가 아니면 도피인가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내 남은 인생을 위한 변화가 필요했다. 청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학원은 헐값으로 선배에게 넘겼다. 내 나이 서른다섯의 늦겨울 새벽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하숙을 하며 미술학원 강사로 일하며 비교적 성실하게 생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아팠다. 사실 몸이 아픈 것 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있는 청주로 다시 내려왔다.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입ㆍ퇴원을 반복했다. 신장내과 진료도 계속 받았다. 하루는 다리가 붓고 구토가 나기 시작해 병원을 찾았더니 만성신부전증 진단과 함께 투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회피하고 싶었지만 예상했던 진단이었다. 혈액투석을 위한 자가 동정맥루 수술일을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동정맥루 수술을 하고 사회사업실에 들러 시신기증 신청 서류를 갖고 집으로 왔다. 내 몸이 망신창이가 되었으니 죽어서도 장기이식 공여자로서는 퇴물 취급을 받을터이고, 의과대 학생들을 위한 실험용으로라도 기증하여 내 병마로 인해 무일푼인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보여준 부모 형제들에게 그 죄스러움을 달래고 싶었다.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나를 위해 희생만 하시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가 계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나는 눈물을 먹물 삼아 ‘누님과 형님 그리고 형수님들에게 남깁니다.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이룬 것 없고 아무런 보답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화장을 해서 아버님과 어머님 산소가 보이는 소나무 곁에 묻어주세요.’ 라고 써내려갔다. 내 인생의 회환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혈액투석을 위한 자가 동정맥루 수술은 가장 권장되는 투석 통로로 혈관이 성숙하는 시간이 필요하여 수술 후 6~8주 후에나 사용이 가능한데, 어찌된 일인지 내 혈관은 성숙되지 않고 자꾸 막혔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수술해도 매한가지였다. 결국 복막투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몸에 두께 6mm의 도관을 삽입되었다. 배꼽 아래로 8~10Cm의 관도 노출되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입원했다. 복막투석은 혈액투석보다 빈혈이나 혈압조절이 용이하고 잔여 신기능 보존에 유리하고 음식이나 수분 섭취에 제한이 적은 장점이 있지만, 대사증후군이 발생되기 쉽고, 복막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루 네 차례 위생적이고 독립된 장소에서 스스로 투석액을 교환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에서만 지냈다. 외부세계와의 단절된 생활로 더더욱 위축되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사람이 싫어졌다. 폐쇄적이고 거칠어졌으며, 일상이 짜증이 났다. 나와 내가 싸우기도 했다. 병마는 지독하게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복막투석을 진행한지 4년째 되니 이젠 뇌경색이라는 놈이 찾아왔다. 투석 6년째 는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빈혈수치가 자꾸 떨어져서 대장내시경을 받아본 결과물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어이없는 쓴웃음만 나왔다. 신은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가혹한지 원망도 하였다. 대장암 수술을 하게 되니 복막투석은 할 수 없었다. 다시 네 번째 혈액투석을 위한 동정맥루 수술을 하였다. 다행히 이번엔 잘 자라 주었다.
 
대장암 증세와 투석환자들이 겪는 경험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대장암 진단을 위한 초기 증세는 변이 검게 나오거나 변비가 있는 것인데, 투석환자들 또한 빈혈 증세로 인해 철분약을 먹으면 변이 검게 나오고, 변비도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장암 수술은 나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대장암 수술 후 20일 후 천공이 의심된다며 또 다시 개복수술을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웠다. 다행히 천공은 아니고 감염이 되었다고 했다. 항생제 치료와 함께 열흘간 더 입원치료를 받았다.
 
몸이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내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내 삶을 얼마나 더 살아낼 지 궁금해 졌다.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시한부인생으로 앞으로 2년 가량 남았다고 했다. 첼린스키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이라는 책 내용 중 이런 대목이 생각났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95%는 쓸데없는 것이고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중략)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당신의 한계를 벗어난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렇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혈액투석을 시작하려고 인공신장실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공포스러운 느낌이 오감을 서늘하게 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누워 있는 신장환자들의 팔뚝과 기계에 라인을 연결해서 흐르는 피가 역겨웠다. 구역질이 났다. 대장암 수술에 이어 혈액투석한지 이제 2년 하고도 9개월째 접어든다. 무의미한 일상이 재미없었고, 삶에 애착이 사라졌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적응을 해 나갔다. 혈액투석을 통해 이틀에 한번씩 만나게 되는 의료진과의 반복된 접촉과 나와 같은 신세의 환우들을 만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이어졌다. 하지만, 난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다 싫었다.
 
그러던 중 같은 병원을 다니던 전00 환우와 김00 환우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의기소침하고 대인기피증이 있는 나를 오랫동안 기다려 주면서 위로해 주고 인내심 있게 잘도 챙겨주었다. 난 타의적으로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한명 두명 환우들과의 만남을 형성해 나갔다. 이제는 환우들과도 어울리고 한국신장장애인충북협회 행사에도 나가고 청주시신장장애인주간보호센터에도 나간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여가를 즐기게 해 주었고, 나와 같은 처지의 환우들과 교감하면서 황폐한 나의 사고가 치유되고 있었다. 지난 9월부터는 수화도 배우고 있다. 무엇을 특별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얼마 남지 않은 내 삶 중에 ‘봉사’라는 값진 의미도 심어두고 싶어서이다.
 
지금은 센터에서 재능기부로 미술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0월부터 진행했으니 벌써 5회기에 접어들었다. 매주 금요일 오후 두시면 다양한 미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모두들 목표를 가지고 즐겁게 참여하니 힘이 났다. 내년에는 작품 전시회도 하자고 아우성이다. 신이 난다. 다시 희망을 품고 꿈을 키워 나의 부러진 날개를 고쳐 세워 힘껏 날아보고자 한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그림을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공유하게 되어 기쁘다. 살맛이 났다. 아니 더 살아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내가 직접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로 고마운 분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싶다. 그러고 보니 크리크마스 카드를 만든지가 어언 20년이 지났다. 가을 즈음하여 미술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된 형형색색의 작품들을 전시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나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긍정의 에너지가 2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한 의사의 말을 무색하게 만들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와 사명이 내 허름하고 초라했던 심신에 생명의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나긴 방황과 허탈의 시간을 보내고 이젠 알에서 깨어 나오는 나를 발견한다. 2013년의 첫눈이 내린다. 암흑의 터널을 지나 이젠 사람들의 도움으로 새 빛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옛 여인이 보고 싶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짝이 되어 평범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다소곳이 내리는 함박눈 사이사이로 아른거린다. 
 
끝으로, 까칠하게 변한 내 성격 탓에 상처를 받은 많은 이들에게 미안함을 표한다. 때때로 까탈스럽게 투정을 부리는 나를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는 홍정민 수간호사를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이 글을 쓰기까지 용기가 되어준 박미자 센터장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진솔하게 가족같이 대해 주는 내 주위의 동료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어줍잖은 나의 이 글이 삶의 낭떠러지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나약한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재생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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