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는 자와 쫓기는 자 -2

[칼럼=오미경 충북분석심리 연구소장] | 기사입력 2014/06/18 [06:08]

쫓는 자와 쫓기는 자 -2

[칼럼=오미경 충북분석심리 연구소장] | 입력 : 2014/06/18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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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은 한국에 있는가? 아니면 이미 떠났는가? 그리고 우리는 유병언으로 인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병언과 관련된 기사는 이미 매인 메뉴가 된지 오래다. 나는 관련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검경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어쩌면 이미 끝난 게임에 미련을 두고 계속 영혼 없는 몸짓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때로는 그 무엇에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면 행위를 쫓아가느라 본질을 놓여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하던 일을 멈추고 머물러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 못 되었는지, 놓이고 있는 본질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누구의 말 한 마디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관련 뉴스들은 실체 없는 루머(rumor)이고, 그들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란작전의 일환이며, 그들의 집단 행위 또한 각본대로 움직이는 연극이라는 생각이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결집할 수 있는 데는 ‘종교이데올로기(religion ideology)’의 작용이 크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각종 이데올로기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종교이데올로기이다. 고대의 종교이데올로기 형성은 매우 단순했다. 그 당시 영적 지도자는 그 시대에 종족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있는 그 어떤 두려움에서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신(기원전9500년경의 여성과 황소의 지배적 상징과 같은...)으로 섬기면 됐었고, 그들이 합의한 그 신이 자신들의 사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신념으로 갖는 것에 그 누구도 의의가 없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관념에만 머물러 있던 종교가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과학적 입증을 해야 하는 시대에 직면했다.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어 오직 믿음의 차원으로 붙잡아 두었던 종교적 관념 부분에 대해서는 불신에 대한 처벌이 더욱 강화 되었다.

어떤 생각을 이데올로기 화 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복된 학습을 통해 신뢰를 형성해야 하는데 이 작업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인간의 두뇌가 발달할수록 그 일관성은 어느 정도 인문사회과학적 입증이 동반 될 때 그 효력은 더욱 강력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화 작업’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비약적이긴 하지만 심지어 약장사의 그것도 그러하다. 인간의 뇌는 착각하는 기능이 있어서, 듣고 또 듣고 또 들으면 처음에 생각했던 의문이 자꾸만 신념으로 변화된다. 인간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자 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더욱 이러한 ‘최면 화 작업’은 유용하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처음 자신이 가졌던 의문 자체를 ‘부인(否認. 방어기제의 하나이기도 함)’하게 된다. 이 단계를 겪으면 처음 가졌던 의문과 비합리적 사실들은 긍정적 의미로 변화되고, 마치 처음부터 그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자신 또한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었던 진리 그 자체였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타인에게도 자신이 만든 긍정 화 된 확고한 신념으로 설득하고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환경적 물질적 요인까지 결합하여 ‘생계형종교이데올로기’화 되었을 때는 그 힘이 더욱 강력해 진다. 실례로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 신앙인이기를 선택하거나 종교단체에 목적성 기부를 하고, 고객모집을 위해 의도적으로 종교인이 되고, 정치적 목적으로 일시적 종교인이 되기도 하는 것들이 그 예이다. 이처럼 개인의 이기로 종교에 접근하는 사람들로 인해 종교는 더욱 퇴색되고 종내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계형종교이데올로기’형성이 가능하게 되는 데는 종교인들의 끼리끼리 문화가 그 힘을 뒷받침해 준다. 서로가 불안정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며 유지해 가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에 힘을 얻고 이웃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며 살고자 하는 목적을 퇴색시키는 데는 분명히 개인의 이기심이 작용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종교인 들은 종교인이 아니면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는 희생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긍정적 요인으로 위로를 얻고, 부정적 요인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재정비하는 지혜도 필요할 것이다. 이번 유병언 사태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지금 어떤 이데올로기에 노출되어 있는지 자신이 신뢰하고 있는 그 이데올로기를 재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칼럼=오미경 충북분석심리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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