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교수의 [중원문화권 하늘재 충주 미륵사지 역사유적 산보]

전 중원대학교 한국학과 이상주 교수 | 입력 : 2020/12/20 [14:28]

▲     ©한국시사저널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8번지 사적 제317호 고려 초기의 절터 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가 있다. 2014년 7월부터 2018년 보수공사 완료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지금껏 마무리하지 못하고 자재를 쌓아놓고 있다. 지역주민들과 불교신도들은 신성한 성지로 순례참배하고 있는 가람터이다. 불교유적을 답사하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지역 경제에도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보수공사완료가 지연되자 주민들도 문화재청과 충주시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첫눈이 많이 내렸으나 햇살이 따사롭게 빛나 포장도로에는 거의 눈이 녹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설경도 보고 명산대찰의 명기도 받을 겸 미륵대원터를 찾아가다가 서로 연락이 되어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륵대원사지의 미륵불, 절의 위치 그리고 주변에 있는 절터와 연관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미륵대원사지는 한국 절터 중에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다. 영남에서 충주를 거쳐 한강을 따라 북진한다. 그리고 고려개경까지 갈 수 있는 교통요충지이다.


고려 초기의 절터 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는 하늘재[寒喧嶺]·계립재[鷄立嶺], 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조성된 석굴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나 내력, 사원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쌓은 위로 목조로 세운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발굴 당시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된다. 현재,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석등, 당간지주 등 중요한 석조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태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 인근에 고려시대의 절터가 여러 군데 있다. 신라 하대의 절터도 하나 있다.


첫째,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월악산(月岳山) 송계리 산3번지에 587년(진평왕 9)에 창건했다는 덕주사가 있다.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은 보물 제406호다. 신라의 마지막 공주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머물러 절을 짓고, 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둘째,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정토사지가 있다. 여기에  보물 제17호 943년(태조 26)에 건립된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가 있다.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는 고려 태조가 ‘法鏡’의 시호와, ‘慈燈’의 탑명을 내렸다 한다. 셋째, 숭선사는 고려 광종 5년(954)에 광종이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太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넷째, 괴산군 칠성면에 있는 통일대사비는 958년(광종 9) 8월로부터 960년(광종 11) 3월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넷째,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022번지에 고려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는 사자빈신사가 있다. 여섯째, 멀리 청주시에 있는 용두사는 962년(광종 13) 김예종이 부처님의 은덕으로 질병이 완치되기를 기원해 건립했다.


사찰들이 모두 신라왕가와 고려 왕실, 그리고 지역 토호들이 건립했다. 고려 왕실과 지역 토호들이 결속과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아울러 호족들은 왕실과의 친밀성을 과시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일 수도 있다.


미륵대원사지와 미륵불 그리고 주변 절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역사적 정치심리학적 민심순화적 관점에서 그 특징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륵대원사지와 미륵불의 특징은 몇 가지 짚어본다. 첫째, 중원지역의 거점사찰이며 북향길목의 중심사찰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남에서 문경 관음리 문막의 관음원을 거쳐 하늘재를 넘어와 북으로 가는 길목이다. 여기서부터 인심 풍속 호족들의 세력은 영남과 성향이 달라지는 분기점이다. 고려초에도 기호와 영남이 조선시대 주로 많이 썼던 말이지만 여기서부터 문화적 풍토가 달라지는 지역의 시발점이다. 여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풍토문화문물을 경험하게 된다. 일대 전환을 유도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둘째 전국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향한 북향미륵불(北向彌勒佛)이다. 북진의 기상을 펼칠 수 있는 원력을 받으라는 계시를 발하는 곳으로 보인다. 셋째, 불상조성기법도 흔치 않다. 사층연접축조기립미륵불(四層連接築造起立彌勒佛)이다. 거대하고 위엄 있는 불상을 1개의 돌로는 조성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규모를 크게 하여 위엄을 보이기 위해 다듬은 돌을 4층으로 이어 쌓아 조성했다. 대단한 공력을 바쳐 조성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정성과 공력에 감동하여 불심이 깊어진다. 넷, 충주 제천 문경 주변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인접해 있다. 이는 부처님의 불법과 대사들의 법력으로 충주 제천의 호족과 토호들을 순화하기 위한 발상일 수 있다. 다섯째 , 정치심리학적으로 살펴본다. 북진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고려초 영남지방 즉 멸망한 신라의 후예들로 하여금 이곳을 지나 충주 제천에 들어서면 고려수도 개경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 주변에 웅장한 절을 지은 것은 부처님의 법력을 받아 백성과 호족들을 고려왕실에 충성하게하고 순화하게하기 위한 심리적 발상에서 기인했다고 상정해볼 수 있다. 여섯째, 충주미륵대원지은 대원 큰 사원으로 불교신도들도 수도하며 머물고 행락객도 머물다가는 숙식처의 역할도 했다. 여기서 숙박하면서 주변의 인정세태와 정국의 동정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어 고려의 시대가 되었으니 고려왕실에 충성해야겠다.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이렇듯 민생민심을 안정시키고 태평성대가 오래도록 유지되기는 기원하는 보국정신을  담아 사찰을 건립하고 미륵불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미륵대원사지를 조속한 기간 내에 보수를 완료하기 바란다. 지금 코로나19와 정치적으로 나라가 매우 불안하고 민심이 흉흉하고 경제도 어렵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부처님의 원력으로 국태민안하고 경제가 부흥할 수 있도록 가림막을 안전시설로 교체와 조속한 보수공사를 마무리하기를 촉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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