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공감을 생각한다

김헌태 논설고문 | 기사입력 2020/07/20 [17:43]

국민공감을 생각한다

김헌태 논설고문 | 입력 : 2020/07/20 [17:43]

  © 한국시사저널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이지만 어떤 사실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둘러대서 하는 말로 쓰인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임기웅변식이다. 오죽하면 이 말이 등장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이 언어를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가는 살펴보면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른바 궤변(詭辯)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얼핏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어 합리화시키며 허위적인 변론을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있다. 온당한 이치도 살피지 않고 가당치도 않는 말을 끌어다가 자기주장이나 조건에 맞도록 합리화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더 나아가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아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얼토당토않은 것을 우겨서 남을 속이려하고 할 때 쓰이는 말이다. 이는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대는 황당한 말을 일컫는다.


 요즘 대한민국은 이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지난 16일 개최되었던 '이재명 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공판에서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시도 건' 관련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를 제외한 3건에 대해서는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벌금 300만원인 원심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환송 조치했다. 고등법원으로 원심 파기•환송 조치된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시도 관련 허위사실 유포 건'의 심리 결과는 무죄 7명, 유죄 5명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6대5로 유•무죄 관련 의견이 맞섰다. 대법원이 일률적인 법적 책임 묻고 이에 대해 수사권이 작동하면 수사기관 중립성 훼손우려와 자유로운 토론에 장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논리이다. 일방적으로 적극적인 허위사실을 공표하지 않는 한 처벌하기 어렵다며 무죄취지로 파기환송을 한 것이다. 물론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지만 사실 이날 생중계까지 하며 진행된 선고공판은 범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TV 토론에서의 거짓답변도 '표현의 자유' 범주에 포함시키고, 공개되는 TV 토론에서의 답변을 공개적인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공표'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며 공직선거법상 TV토론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아주 좋지 않은 판례를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대법원의 선고이후 국민적인 신뢰가 많이 무너져 내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판결이지 법적인 판결로 공감을 얻기에는 어딘가 1인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반기는 측은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사필귀정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며 환영하고 있지만 이는 역사의 평가로 남게 되었다.


 요즘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2차 가해가 극성인 가운데 피해자를 매도하는 발언이 방송을 버젓이 타고 있다.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 피해자를 조롱하고 매도하는 발언이 등장하는지 그 심리상태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충남에 이어 부산, 서울까지 이어지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고 언어폭력으로 2차 가해에 편승하는 것을 보며 상당수 국민들이 공분하고 있다. 이들 은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로서 또는 검사로서 변호사로서 쏟아놓는 언어들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심각성이 매우 크다.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사고를 갖춘 사람들이 편파성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 공적인 방송인이나 공인의 자세이다. 방송의 경우 편견과 사견이 지배하면 이는 공적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회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불공정한 언론임에 다름 아니다. 그 누구든지 궤변이나 지록위마식의 언어구사로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거짓을 진실인양 포장한다고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지났고 국민들의 수준도 그게 아니다. 언어와 사고에 있어 상식이 통하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품격 있는 노력은 언제나 그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특히 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 법이 권력 앞에 무력해지면 그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범한 진리가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 법의 잣대가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이 되어서는 결코 정의가 바로 설 수 없다. 법과 양심이 존재하는 사회와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민들은 사소한 도로교통법만 어겨도 과태료를 문다.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은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 기타 각종 법을 크게 어겨도 법망을 벗어나고 감옥에 가도 훗날 사면복권을 통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느냐 하는 볼멘소리도 들리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적용도 그동안 성토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다. 법위에 군림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이는 정의가 아니다. 사회지도층에서 국민들의 등불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함에도 변칙과 반칙의 사회를 조장한다면 이는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이며 국민들을 배신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작금에 대한민국 사회의 크고 작은 많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처럼 정치와 이념이 대립하는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분법적 분열과 반목의 악순환이 멈추질 않고 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과연 이대로 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조차 의아해 하고 있다. 그야말로 가치관과 정체성 혼돈의 시대이다. 이현령비현령, 궤변, 견강부회가 판을 치고 있다. 심지어 지록위마의 거짓도 난무하고 있다. 어딘가 숨어서 음험한 작당과 권모술책을 꾸미지는 않는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인다. 집단이기주의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민심도 흉흉하다. 마스크는 쓰고 다니지만 복불복(福不福)이라고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잠재적 장소가 식당과 대형마트, 관광지, 지하철, 대중교통 등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위난의 시기일수록 카멜레온의 탈을 벗어버리고 법과 질서, 양심을 가다듬고 정도를 걸어가고자 하는 사회지도층의 각성과 사회대통합의 거대한 용트림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국민 공감의 길이자 대한민국이 바로 서는 길이 아닌가 싶다.        

김헌태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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